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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럿정보

페럿에 대한 각종 정보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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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페럿의 역사
작성자 INTERZOO (ip:)
  • 작성일 2018-07-30 16:4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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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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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에서 애완동물로

한 저자에 따르면 2000년 이전부터 사람들은 페럿을 길들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이 없는데다가 지역마다 다른 명칭을 사용한다는 문제 외에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명칭을 번역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페럿의 기원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성격이 온순하고 길들여지기 쉬운동물에 대해 언급한 기록(BC 350년경)을 남겼는데 이 동물이 페럿일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20년경부터 기원후 60년까지 살았던 그리스 지리학자 슈트라본(Strabon)의 기록이있다. 이에 따르면 지중해 서쪽의 발레아렌 군도에서 토끼퇴치를 위해 페럿을 이용했다고 한다. 또한 토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섬 주민들이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황제가 페럿을 보내주었다는 플리니우스(Plinius der Ältere, A.D. 23-79)의 진술도 있다. 플리니우스는 당시 페럿을 “Viverrae"라고 불렀다. 스페인에서는 이미 아랍 지배 당시 페럿이 토끼 사냥에 이용되었다. 이런 페럿을 이용한 사냥을 푸로(“Furo")라고 불렀는데 이런 명칭은 이시도르 세빌라(Isidor von Sevilla, A.D. 561-636)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페럿은 지중해연안의 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동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에서 시작하여 토끼의 번식과 함께 페럿도 전 유럽과 영국지역까지 퍼진 것이다.

 페럿에 관한 이러한 언급을 전제로 하면 페럿이 북아프리카에서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서 페럿은 토끼 사냥을 위해 사육되었고 주둥이에 망을 씌워진 채 토끼 굴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페럿 사육은 훗날 유럽, 아시아, 영국에 소개 되었고 이곳에서는 지금까지도 페럿을 이용한 토끼 사냥이 일종의 스포츠가 행해지고 있다. 페럿을 이용한 토끼 사냥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14세기 기록이 남아있다.

1221년 징키스칸도 페럿을 사냥 시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독일에서는 알베르투스 마그너스(Albertus Magnus, 1193-1230)가 길들인 긴털족제비의 활용에 대해 말한 바 있다. 1245년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가 소유했던 동물기록을 보면 페럿이 등장하고 있다. 프랑스의 자스동 페뷔스(Gaston Phebus) 백작의 사냥일지를 보아도 14세기 말 토끼사냥에 입마개를 한 페럿을 이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국에서는 1223년 처음으로 페럿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리고 죤 레드게이트(John of Lydgate)라는 시인이 1421년 지은 시에서는 알비노(Albino-Frettchen)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볼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한 사냥일지에서는 토끼사냥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이 기술되어 있다. 페럿이 생포한 토끼에 대한 취급 기준도 당시 이미 정해져 있었다. 페럿은 187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1882년 호주 그리고 1897년에는 뉴질랜드에까지 펴지게 되었다. 그러나 페럿이 여기저기 퍼져 번식했음에도 불구하고 토끼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토끼보다는 농장에 있는 병아리를 잡아먹는 것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깨달은 페럿이 토끼가 아닌 병아리를 잡아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토끼뿐만 아니라 페럿도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린네(Linnaeus)의 분류법에서 페럿은 Mustela furo라 명명되었고 이때 페럿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ferret”이라는 단어는 도둑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furonem와 이탈리아어 furone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putorius”라는 단어는 페럿의 고약한 사향 냄새를 의미하는 라틴어의putor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ferret”은 동사로 페럿의 행동과 특성을 반영하는 뜻 즉, ‘은신처에서 나온다 혹은 예리한 탐색이나 예리한 질문을 통해 밝혀내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페럿은 이전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역시 사냥과 생물학적 연구에 사용되며 최근에는  애완동물로도 이용되고 있다. 애완용 페럿은 야생의 유럽 페럿 또는 긴털족제비의 길들여진 형태라고 볼 수 있다(M. putorius or M. furo) 또는 매우 유사한 두개골 형태를 갖고 있는 대초원의 긴털족제비(M. eversmanni)와 가까운 친족일 수도 있다. 이미 약 300년 전 영국 이주자들에 의해 집페럿이 북아메리카에 소개되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페럿이 야생집단을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1642
년에 처음으로 네덜란드인들이 뉴질랜드를 방문하였고 당시 그들은 토착민인 마오리족 사람들에게 불친절한 접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탐험가 중 네 명이 살해 되기까지 했다(12).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유럽인들은 그 후 127년이나 뉴질랜드 땅을 밝지 않았고 제임스 쿡(James Cook)이 뉴질랜드를 세 번 방문(1769년부터 1770, 1773년부터 1774, 그리고 1777)하면서부터 유럽인들이 다시 뉴질랜드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 수십 년 동안은 대개 고래잡이와 바다표범 잡이를 위해 유럽인들이 뉴질랜드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점차 풍부한 목재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60년에는 금이 발견되어 수만 명의 사람들이 뉴질랜드로 몰려들었다. 1867년 서해안의 인구가 29,000명이나 될 정도였다. 이주민들이 농경지를 확장하면서 사냥감이 줄어들자 사람들은 사냥감이 될만한 다양한 동물들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1864년 남섬에 야생 토끼가 수입되었다. 그러나 1870년 대에는 토끼가 목초지를 황폐화 시키고 토양을 약화시키는 골치거리가 되었다. 토끼가 목초지를 황폐화 시키면서 양이 뜯어먹을 풀이 부족하기 시작했고 양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목초지의 황폐화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수백만 마리의 토끼를 죽였지만 토끼의 수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뉴질랜드는 토끼를 잡아먹는 기존의 육식동물을 통한 자연적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결국 추가로 육식동물을 수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바로 유럽에서 토기사냥꾼으로 잘 알려진 집페릿을 수입하게 되었다. 조류학자들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토끼의 수를 조절하기 위해 페럿을 수입할 경우 조류, 특히 날지 못하는 새들이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하며 페럿의 수입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페럿의 수입을 원했던 농부들의 입장이 관철되었고 1879년 최초로 다섯 마리의 페럿이 콘웨이(Conway) 강가에 방사되었다. 이후 1882 1886년 사이에는 두 가지 종류의 페럿(Stoat, weasel) 수천 마리가 방사되었다.

뉴질랜드 농업부(New Zwealand Department of Agriculture) 1897년까지 방생을 목적으로 페럿을 사육하였고, 1912년까지 사육 시설을 민영화하였는데 이러한 시설에서 매년 약 300 마리의 페럿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페럿이 토끼의 수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정부의 페럿 장려 정책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50년 완전히 철회되었다. 1944년에서 1948년 사이 모피 생산을 위해 많은 수의 페럿과 흰담비를 사용하였지만 페럿의 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50년 이후 토끼 번식이 화학약품을 이용하여 통제되기 시작하면서부터야 뉴질렌드의 페럿의 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미해군의 마스코트 페럿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페럿은 쥐 박멸을 위해 선박에서도 이용되었다. 혁명전쟁 시 매사추세츠주의 해병 국민군(Massachusetts Colonial Navy) 1775년 12월 29일 결성되었다. 주의회에서 제정한 매사추세츠주의 공공복지 관련 법령에 따라1967년에 과거 혁명전쟁 당시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부대가 결성된 것이었다. 1986년 9월 14일브리스톨대(Bristol Community College)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거행된 인상적인 기념행사에서 페럿이 해군의 공식 마스코트로 선언되었다. 다음은 당시 연설문 중 일부를 발취한 것이.

오늘은 매사추세츠주의 해병 국민군에게 있어서 역사적으로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시고 오늘 이 행사의 증인이 되어 주시기 위해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알기로는 17세기 이후 그러니까 200년이 넘도록 이러한 자리가 마련되지 못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장교와 일반 선원 모두가 밝은 내일을 염원하며 개최되었던 행사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지휘권 전달을 위한 엄숙한 자리나 새로운 함선을 공개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는 우리 해군의 마스코트를 소개하기 위한 기쁜 자리입니다!

과거 해군함선들은 쥐와 같은 불청객 때문에 피해와 불편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개는 쥐를 잡는데도 효율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밤새 짖는 통에 선장과 선원들이 숙면을 취하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개 보다는 쥐 잡는 대는 능숙했지만 작은 구멍이나 좁은 통로로 숨어들어간 쥐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쥐가 어디에 숨든지 결코 놓치지 않는 동물이 있었습니다. 구멍이 아무리 작아도 반드시 쥐를 잡아오고야 말았습니다. 이 동물은 쥐를 박멸시키는 공을 세웠고 동시에 사람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해군 선원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오늘 페럿을 우리의 마스코트이자 친구로 선언하고자 합니다.

오늘 매사추세츠주의 해병 국민군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자 모였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해군과 참석자들 앞에서 공포합니다.

1986년 9 17인 오늘 수세기가 지나는 동안 페렛이 생쥐와 쥐 및 기타 설치동물들을 박멸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페렛이 함선에서의 생활의 질 향상에 기여하였으며 페렛이 선원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에 기쁜 마음으로 페렛(Mustela foru)을 매사추세츠주의 해병 국민군의 공식 마스코트로 선언합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페럿은 애완동물이라는 전혀 새로운 영역에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페럿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 애완동물계에서 사랑받는 애완동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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